차가운 밤에, 파를 썰다
아파트에 도착한 나는 숄더백을 내려놓고, 반지와 귀걸이를 빼고, 손목시계를 풀고, 스타킹을 벗는다. 그리고 커튼을 닫는다. 벗은 옷을 옷걸이에 반듯하게 걸어놓고 방바닥에 벌렁눕는다.
몸과 머리가 무거워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기분이다. 데굴데굴 굴러본다. 고독은 줄지 않는다. 아, 음, 하고 신음해본다. 고독은 줄지 않는다. 팔다리를 버둥거려 본다. 고독은 1그램도 줄어들지 않는다.
"바보 짓이지."
나는 앞으로 쏟아져 내린 머리를 두 손으로 추어올리면서 일어나 부엌으로 간다.
냉장고를 연다. 우유를 팩 채로 입을 대고 마신다.
컵에 따라 마시는 것보다 고독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수첩을 뒤적거리면서 아직 들어오지 않았을 만한 사람이 있는지 생각한다. 이렇게 여기저기 무턱대고 전화를 걸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밤에는누구와 얘기를 하면 할수록 고독해진다. 지겹도록 잘 알고 있다.혼자 있는 방에서, 무심코 텔레비전을 켜는 바람에 요란한 소리가 쏟아져 나오면 더욱 고독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도, 천지신명께 맹세코 그 누구도, 타인의 고독을 덜어줄 수 없다.
볼이 얼얼해질 정도로 얼굴을 씻고서, 두쿰한 수건에 얼굴을 묻는다. 나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가 천천히 숨을 고른다.
이런 밤에는 파를 썬다. 잘게, 잘게, 아주 잘게. 그러면 아무리 울어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파의 색, 파의 모양,파의 냄새. 손가락에 나긋나긋 들러붙는 파의 감촉. 파를 썰면서 또 눈물을 흘린다. 눈앞에 엷은 초록색이 번진다.
나는 울면서 파를 썬다. 전기 밥솥의 스위치를 누르고 파를 썰고, 된장국을 만들고서 파를 썰고, 두부를 자르고는 또 파를 썬다.
온 마음을 다해서, 마치 기도라도 하듯. 누가 나를 꾸짖기라도 하면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마음을 바꾸고 싶은 것일까. 무슨마음을, 어떤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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