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네가 며칠 있다가 전화하겠다고 하면 나는 그 때부터 아무일도 못하고 전화를 기다리지.
다른 일들이 다 짜증스럽기만 해.
만날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네가 전화를 하겠다고 했을 뿐인데도,
무슨 옷을 입을까, 머리가 너무 자랐나, 손톱을 다듬을까 부산스러운 마음이지.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무슨 벽보에 사랑이란 서로에게 시간을 내주는게 아깝지 않은 것, 이라고 써 있었지.
금방 너를 생각했어. 언제부턴가 내게 시간을 내주지 않는 너를.
그 풀칠이 덕지덕지한 벽보 앞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얼마나 절망했는지.
매사가 이런 식이야. 나는 그렇게 되어버렸어.
나는 그렇게 되어버렸지.
어느 날 우연히 내 눈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언젠가 네가, 네 속눈썹을 세어봤는데 마흔두 개야, 했던 말이 생각나면
그 생각 하나로 세상을 다 얻은 듯이 살아가지.
그걸 세어볼 정도면 너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 여겨지기에.
"전화를 하겠다고 하고선 전화를 못 받고 몇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대로 죽는 거 같아. 알어?
수화기가 잘못 놓였다, 들었다 놔보고 혹시 벨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까봐 소리나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한번은 어쨌는 줄 알어? 전화를 기다리는데 오로지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는데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래서 냉장고 플러그를 빼놓았지.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다른 일은 조금도 할 수가 없어.
벨이 울렸는데 네가 아니면 너무나 낙담을 해서 전화를 한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싶은 심정이야."
"난 그래. 그렇게 되어버렸어."
난 그렇게 되어버렸지. 너에 의해 죽고 싶고 너에 의해 살고 싶게 되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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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신경숙, 깊은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