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글

달려라 아비



 

9

나는 내가 얼굴 주름을 구길수록 어머니가 자주 웃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외로워졌다. 그러나 세상은 조용했고, 햇빛은 헤어진 애인이 보내온 예의바른 편지처럼 여전히 저쪽 방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11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오늘까지만 기다리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아버지는 항상 그 다음날 오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늦게 왔지만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머니는 이 주눅든 지각생의 눈빛 때문에 항상 먼저 농담을 건네던 여자였다.

상상하건데 아버지는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안해서 못 오는 사람, 미안해서 자꾸 더 미안해해야 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

나중에는 정말 미안해진 나머지 못난 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겟다고 결심한 사람.

 

 

 

 

 

12.

나는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나쁘면서도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16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22.

말하자면,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십수년 만에 우편을 타고 가뿐하게. 의도를 알 수 없는 선의처럼,

종지감 없는 연극이 끝난 뒤에 터지는 어정쩡한 박수처럼 아버지는 돌아왔다.

낯선 억양의 인사를 건네며 돌아온 부고.

그때까지도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세계곳곳을 달린 이유가

결국 우리에게 당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당신이 죽었다고 말하기 위해 먼 곳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까지 세게를 뛰어다닌 것이 아니라 미국에 살고 계셨다.

 

 

편지는 아버지의 자식이 보내온 것이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사전을 찾아가며 편지를 해석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결혼을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조금 놀랐다. 아버지가 애초에 가정을 원하지 않은 남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를 버린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를 정말 사랑했거나, 아니면 그곳이 여기보다 도망치기 쉬운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몇년 후 아버지는 이혼을 했다. 구체적인 이혼사유는 씌어있지 않았지만 아마도 아버지의 무능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부인은 위자료를 요구했다. 한푼도 없던 아버지는 주말마다 부인의 집에서 잔디를 깎겠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가 '미국에서 잔디를 깎지 않으면 이웃에게 신고를 당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부인은 곧 운동장만한 잔디밭이 있는 사내와 결혼했다.

 

 

 

 

 

 

 

 

 

75

나는 그가 내게 어른 대우를 해주는 게 좋았다.

나는 안테나가 가리키는 하늘을 보며,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먼지냄새를 맡으며 ,

내가 이곳에서 혼자 "나야......"하고 말하면

저 별 어디에서 누군가 울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79.

그때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적이란, 바로 그 눈감아주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일지 모른다고.

 

 

 

 

 

 

 

134

 

나는 내가 고부가가치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똑똑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연락도 없이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145

세상에 이유를 알고 나면 너무 시시해져버려

오히려 영원히 알지 않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은 이유가 있다.

그리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것들은 반드시 할 말이 있는 것이다. 

 

 

 

 

 

 

 

180

안녕하세요. 가늠할 수 없는 안부들을 여쭙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안녕하고 물으면, 안녕하고 대답하는 인사 뒤의 소소한 걱정들과

다시 안녕하고 돌아선 뒤 묻지 못하는 안부 너머에 있는 안부들까지도 모두,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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